도심 속에 만들어진 인공암벽이나 자연암벽에 만들어진 스포츠 클라이밍 루트들은 대부분 90도에 가깝거나 오버행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스포츠 클라이밍의 등반 시스템은 등반자의 안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고정 확보물의 설치는 물론이고 톱로핑과 다양한 빌레이 시스템 등 고전적인 암벽등반이 배제하기 쉬운 안전위주의 시스템들을 발전시킴으로서 현대인들에게 도전을 통한 끊임없는 흥미와 등반에 대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게 했다. 스포츠 클라이밍이 가지고 있는 최대 장점은 안전하면서도 편리하게 도전과 스릴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21세기는 생명 존중의 시대이다.
이러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알피니즘 문화는 점점 친밀감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클라이머들이란 도전을 중시하고 그 도전의 가치를 죽음보다 거룩하게 여긴다는 의식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스포츠 클라이밍은 알피니즘의 진수인 순수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구와 만족감, 희열감을 채워줄 수 있는 길라잡이가 될 수 있는 도전 스포츠로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 이제 새로운 21세기 신 등반문화로 떠오르고 있는 스포츠 클라이밍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보자. 다양성, 전문성은 20세기 후반부터 현대사회를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표적인 단어들이다. 등반계에도 이러한 흐름은 예외일 수 없다.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전문성은 등반문화에도 영향을 끼쳐 왔으며 행위의 대상은 확대되고 행위의 형태는 전문화된 새로운 알피니즘(alpinism) 문화들을 만들어 왔다. 알파인등반(alpine climbing), 빅월등반(big-wall climbing), 스포츠 클라이밍(sport climbing) 같이 이제 알피니즘은 다양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각각의 분야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졌다.
각각의 분야들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을 겪으면서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뚜렷한 메시지와 기술적인 특성들을 만들어냈으며 저마다의 독특한 등반문화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스포츠 클라이밍은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등반문화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클라이밍의 중심에는 수세기를 이어 내려온 순수한 등반철학(필자는 놀이, 자연, 도전, 자유를 순수 등반철학의 중심으로 본다)이 내재되어 있으며 자연에 접근하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를 인위적인 규칙(rule)으로 제한하는 스포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다. 온싸이트(on-sight), 플래싱(flashing), 레드 포인트(red-ponint) 같은 등반 형태의 구분과 5.10급, 5.11급 같은 등반 난이도의 구분은 스포츠 클라이밍을 구성하는 규칙들이다. 스포츠 클라이밍이 가지고 있는 뚜렷한 목표는 인간 한계에 대한 도전과 그 도전을 통하여 얻어지는 만족감을 극대화하는데 있다.
여섯 가지 주제가 만들어내는 행위예술
신체적 능력, 정신적 안정감, 조화력과 기술, 선천적 재능, 전술, 외부 환경 등은 스포츠 클라이밍이라는 등반문화가 필요로 하는 여섯 가지의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서로 중복되기도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등반에 대한 동기는 육체적 힘을 증가시키나 심리적인 두려움은 조화력과 기술력을 떨어뜨린다.
조화력과 기술력은 학습 능력과 재능에 따라 증가하며 신체 능력의 증가는 심리적 안정감의 상승을 동반한다.
스포츠 클라이밍은 강한 근력과 함께 폭넓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스포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강한 어깨와 손가락의 힘을 요구하며 동시에 두뇌의 사고능력과 연산능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단순하면서 과감한 동작 뿐만 아니라 섬세하면서 지속성을 지닌 기술들을 요구하기도 한다. 따라서 힘이 뛰어나다고 하여 스포츠 클라이밍을 잘할 수 있다는 등식은 언제나 성립되지는 않는다.
이는 스포츠 클라이밍이 다양한 조건들을 조정할 수 있는 뛰어난 조화력(coordination)을 바탕으로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클라이밍이란 신체의 여러 기관들의 조화로운 움직임에 따라 이루어지는 스포츠이다. 신체가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이러한 동작들을 조정하는 기술,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적절히 통제하는 지각능력 등은 스포츠 클라이밍을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조건들이다. 따라서 스포츠 클라이밍이란 주변의 환경들과 클라이머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조건들이 조화를 통해 이루어내는 종합적인 스포츠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거의 무한대로 표현할 수 있는 행위예술(performance)의 스포츠이다.
스포츠적 규칙 하나, 등급(grade)
등급체계는 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에 맞는 루트를 고르거나 도전하고 싶은 루트를 선택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최초의 현대적 등급체계는 1920년대에 독일인 빌로 벨젠바하(Willo Welzenbach)에 의하여 고안되었다. 벨젠바하의 등급체계는 로마숫자를 사용하여 등급을 Ⅰ급부터 Ⅵ급까지로 구분하였으며 제Ⅵ급을 극도로 어려운(extremely difficult) 등급으로 정의하였다.
오늘날 등반 선진국이라고 불리우는 구미의 여러 나라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각각의 등급체계를 사용하고 있는데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이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한국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등급체계인 요세미티 십진 등급체계(YDS: Yosemite Decimal System)를 사용하고 있다. 1950년대 만들어진 요세미티 등급체계는 다섯 단계로 구분되는데 제5급부터가 등반에 해당한다.
5급은 다시 어렵기의 정도에 따라서 5.0에서 5.9급까지 10단계로 구분하였고 5.9급을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등급으로 정의하였다. 1980년대 자유등반의 발전과 함께 등반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요세미티 등급체계는 고난이도 등급에 대한 부분을 수정, 보완하였다. 가장 어려운 등급이라고 표현했던 절대등급을 없애고 등반의 수준이 향상하면 등급도 따라서 올라가도록 등급체계의 유연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요세미티 등급체계는 고난이도의 등급을 나타내는 5.10급부터 각 등급을 a,b,c,d로 세분화하고 있다. 요세미티 등급체계는 유럽의 프랑스 등급체계와 함께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등급체계이다. 요세미티 등급체계와 프랑스 등급체계 사이에는 등급을 결정하는 방법에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등급체계는 루트 전체를 등반하는데 소요되는 기술, 체력적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등급을 구분하였다. 따라서 프랑스식 등급체계는 체력소모가 많은 큰 각도에 만들진 루트의 등급은 높게 책정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요세미티 등급체계는 루트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즉 크럭스(crux)의 어렵기를 주로 나타내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등급 결정 방법은 스포츠 클라이밍의 발전과 함께 콜로라도의 라이플 등 미국 전역에 걸쳐 고난이도의 신루트들이 개척되면서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따라서 루트의 부분적인 난이도를 책정하는 방식에서 체력과 기술적 요인들을 감안하는 프랑스식 등급 결정 방법을 도입하였고 새로 만들어진 대부분의 루트들은 프랑스식 방식을 도입한 새로운 요세미티 등급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표 2>는 요세미티 등급체계와 프랑스 등급체계 등 각국의 등급체계를 비교해 놓은 도표이다. 같은 루트를 등반하더라도 오르는 방법에 따라 어려움은 달라진다. 온사이트(On-sight)는 등반 방법 중에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서 루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이 떨어지지 않고 첫 번째 시도에 성공하는 것을 말한다. 온사이트는 가장 가치 있는 등반방법 가운데 하나이며 기회는 한 루트에 단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온사이트는 클라이머의 등반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 중에 하나이다.
스포츠적 규칙 둘, 온싸이트, 플래싱, 레드 포인트
플래싱(Flashing)은 루트를 등반하는 어려운 방법 중에 하나이다. 온사이트처럼 클라이머가 그 루트를 떨어지지 않고 첫 번째 시도에 성공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플래싱과 온사이트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차이가 있다. 플래싱이 온사이트와 다른 점은 그 루트를 등반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오르는 것을 보거나 많은 생각을 요하는 중요한 동작 등 결정적인 정보들을 미리 알고 있어도 된다는 점이다.
플래싱 또한 매우 가치있는 등반방법 가운데 하나이며 온사이트처럼 기회는 한 루트에 단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레드 포인트(Red point)는 독일 클라이머인 쿠르트 알베르트(Kurt Albert)의 등반 방식에서 유래된 말로서 로크 풍크트(Rot Punkt)를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레드 포인트는 온사이트나 플래싱과는 달리 여러번의 등반이나 사전연습이 허용되는 등반방법을 가리킨다. 레드 포인트는 클라이머가 홀드의 모양이나 방향, 어려운 부분의 동작, 볼트의 간격, 클립을 위한 가장 좋은 지점 등은 연습을 통하여 미리 익혀 둘 수 있다.
따라서 레드 포인트로 등반하면 온사이트 보다 더 높은 등급의 루트를 등반할 수 있다. 하지만 레드 포인트가 여러 차례의 등반을 허용한다고 하여 루트를 수십번씩 반복하여 연습하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이다. 수십번씩 시도해야 등반할 수 있는 루트보다는 오히려 조금 낮은 난이도의 루트를 아주 적은 횟수로 성공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등반이라고 할 수 있다. 레드포인트 또한 등반 능력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클라이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능력을 말한다.
엔그램(engram) 스포츠
스포츠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자의 동작은 매우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 보이고 하나의 동작을 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현상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이는 등반을 계속하다보면 반복되는 특별한 동작들이 신경자극을 통하여 뇌에 저장되고 이렇게 저장된 정보들이 수천개의 순간적인 신호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클라이머가 아주 생소한 동작을 요구하는 고난도의 루트를 처음으로 등반한다고 가정하자.
대개의 루트들이 그렇듯이 어려운 부분을 등반할 때에는 빠르고 정교한 근육의 움직임을 요한다. 이처럼 빠르고 정교한 근육의 움직임을 요할 경우 뇌가 팔, 다리의 신호를 받아서 명령을 내릴 시간적인 여유가 없게 된다. 그 결과 힘을 적절히 안배하기가 어려워지며 그 동작에 대한 경험들이 뇌 속에 만들어지기까지 등반은 불가능하게 된다. 반대로 어떤 클라이머가 고난도의 루트지만 자신에게 매우 익숙한 동작을 요구하는 루트를 처음으로 등반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비록 그는 그 루트를 처음 등반하지만 이전 경험에 의하여 자연스러운 동작들을 연출할 수 있으며 효과적인 힘의 안배가 가능해지게 된다.
그럼 스포츠 클라이밍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알아보자. 인간의 뇌는 신체의 여러 부분들을 통하여 감각신경의 신호를 끊임없이 받는다. 이를 가리켜 피드백(feedback)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신호들은 근육, 건, 관절 그리고 피부에 있는 감각신경들로부터 전달된다. 뇌는 이러한 지각신호들을 분석, 조정한 후 동작에 필요한 근육을 지시하여 신체를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문제는 수집된 정보의 양이 너무 많으면 뇌가 순간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신체의 움직임은 경직되고 마치 처리 용량이 넘친 컴퓨터처럼 효과적인 명령을 내릴 수 없어 더 이상의 동작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때 뇌는 신체를 움직이기 위한 또 다른 대안을 가지게 되는데 그 대안이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기억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즉 대뇌라는 정보 창고 속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들을 되살려 기억 속에서 신체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운동 기술 회상(motor skill engram)’ 또는 ‘기억의 흔적’이라고 부른다.
‘기억의 흔적’이 만들어 가는 스포츠 클라이밍
스포츠 클라이밍처럼 다양하고 정교한 움직임을 요하는 스포츠도 드물다. 클라이머가 어려운 부분과 마주치면 뇌는 앞에 있는 홀드들의 정렬에 맞는 하나의 ‘기억의 흔적’을 찾는다. 뇌는 다양한 형태로 저장된 ‘기억의 흔적’들과 등반하는 동안에 뇌가 입수하는 정보를 비교한다. 한 루트의 동작들이 자신의 기억에 저장된 것들과 일치하게 되면 ‘기억의 흔적’ 즉 ‘엔그램(engram)’이 등반을 좌우하게 된다.
이렇게 ‘기억의 흔적’들에 의하여 몸은 비행기가 자동 항법장치에 의해 순조롭게 움직이듯 부드럽게 움직이게 되고 힘을 절약하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하는 등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결국 여러번 경험해 본 루트들이 훨씬 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루트가 요구하는 특별한 동작들을 여러번 반복하여 익힘으로써 의식적인 감시체계의 필요성은 줄어들고 반대로 등반에 필요한 동작에 대한 ‘기억의 흔적’들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숙련된 클라이머가 어려운 부분을 등반하면서도 매우 편안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한 형태의 기억의 흔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등반루트에 대한 폭넓은 등반 경험과 인공암벽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형태의 기술적인 트레이닝은 클라이머가 ‘기억의 흔적’을 만드는데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할 수 있다. 인공암벽에서 실시하는 기술적 트레이닝은 자연암벽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트레이닝을 실시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억의 흔적’의 폭을 넓혀 가는데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특히 트레이닝 시 손으로 사용하는 홀드와 발로 사용하는 홀드를 동시에 제한하여 루트를 만들어 놓고 그 루트를 반복적으로 등반하는 트레이닝을 실시하면 쉽게 ‘기억의 흔적’ 을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실제는 아니지만 마음속의 정확한 상상을 통해 그 동작을 여러번 반복할 때에도 그러한 형태의 신경자극은 뇌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박히게 되며 ‘기억의 흔적’으로 저장된다. 클라이머들이여! 다양한 ‘기억의 흔적’들을 만들어라다양한 ‘기억의 흔적’들이 기억의 저장고를 가득 채우도록 노력하라. 믿음직한 내 ‘기억의 흔적’은 스포츠 클라이밍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할 것이다 |